천재 음악가 어리사 프랭클린
글 : 드닌 L. 브라운 사진 : 일라이어스 윌리엄스
그녀는 아픔과 열정을 통해 형성된 재능을 꽃피운 신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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빳빳하게 다린 흰 셔츠를 입고 바깥쪽으로 뻗친 검은 단발머리를 한 어리사 프랭클린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1967년 1월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미국 앨라배마주 머슬숄스에 있는 전설적인 녹음실 페임 레코딩 스튜디오로 걸어 들어갔다.당시 겨우 24살이었던 어리사는 곧 놀라운 존재감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이때는 그녀가 음악과 대중문화의 상징적인 인물, 즉 ‘솔의 여왕’ 어리사 프랭클린이 되기 전이었다.
그날 그녀는 신비에 싸인 인물이었다. 녹음실의 연주자들은 그녀의 등장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 어리사에게는 인기곡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앞서 6년 동안 컬럼비아 레코즈에서 절제된 형태의 재즈곡을 녹음했지만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한 터였다. 애틀랜틱 레코즈의 제작자 제리 웩슬러는 이제 어리사가 복음 성가를 부르기를 원했다. 당시 페임 레코딩 스튜디오에 소속된 연주자들은 미국 남부 풍의 리듬앤블루스(R&B) 음악을 하며 펄시 슬레지의 대표곡 <웬 어 맨 러브스 어 우먼> 등 꽤 많은 인기곡을 배출해온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