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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의 이야기

글 : 아나스타샤 테일러-린드 사진 : 아나스타샤 테일러-린드

어머니의 시 낭독, 아버지의 장황한 여행 이야기, 나의 예리한 시각, 책 속의 사진. 이 중 무엇이 내가 사진기자가 되는 데 영향을 미쳤을까?

나는 여행을 하며 자랐다. 아버지는 영국 런던의 중심부에서 태어났지만 시골에 가서 마차에서 사는 삶을 꿈꿨다.

나는 1981년 부모님이 떠돌이 생활을 하던 중 태어났고 그 후로 몇 년간을 부모님과 함께 말을 끌고 영국 남부를 돌아다녔다. 결국 부모님은 우리가 마차를 두고 살던 데번에 땅을 샀다.

내가 13살이 될 때까지 우리 집에는 수도나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훌륭한 이야기꾼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들려주는 히피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어머니는 매일 밤 나를 재우면서 동화와 동시를 읽어줬다. 어릴 때 나는 커서 영국의 시그프리드 서순이나 윌프레드 오언처럼 전쟁에 관해 시를 쓰는 시인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1980년대에 촬영한 아나스타샤 테일러-린드의 가족 사진이다. 아나스타샤가 아버지 베들레헴 테일러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진을 찍고 있는 어머니 엘러노어 린드를 향해 걸어 가고 있다. 스타와 블루라는 이름의 말 두 마리가 테일러-린드의 가족이 집으로 사용했던 마차를 끌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 나는 사진 수업을 들었는데 그 수업에서 책 한 권을 접하게 됐다. 영국의 사진작가 돈 맥컬린이 베트남 전쟁에서 찍은 사진이 실린 책이었다. 흑백 사진 속에서 부상당한 젊은 해병 대원들이 서로를 돌보고 있었다. 이 사진들은 무척이나 극적이고 낭만적이었다. 그런데 그 사진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던 제1차 세계대전에 관한 시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사진기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나는 전쟁을 노래하는 시를 쓰는 일보다는 전쟁 사진을 찍는 일이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전쟁 전문 사진기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식겁했다. 그녀는 내가 위험한 곳에서 일하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처음부터 전적으로 나를 응원해줬다. 아버지는 사진기자가 내가 평생의 직업으로 삼기에 아주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대학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술을 전공한 뒤 2003년 영국군과 미군과 함께 싸우던 쿠르드족 민병대 ‘페쉬메르가’의 여성 부대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이라크 쿠르디스탄으로 갔다. 아버지는 1970년대 후반에 쿠르디스탄을 여행하며 그곳에서 낯선 이들로부터 환대를 받은 놀라운 이야기를 해줬다. 내가 취재를 위해 처음 해외로 나갈 당시 가족들은 하나같이 걱정을 했다. 하지만 아버지만은 내가 이라크에서 외롭거나 배고프거나 머물 장소가 아쉬울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아버지의 말이 옳았다.

아버지는 할머니를 설득해 현금 1000파운드를 여행 경비로 내게 빌려줬다. 나는 그 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20파운드짜리 지폐들을 비닐봉지에 싸서 부츠 깔창 밑에 넣었다. 나는 한 짝에 500파운드가 들은 부츠를 신고 터키에서 국경을 통과했다. 이는 당시 내게 아주 큰 돈이었다. 22살이었던 나는 세상 경험이 너무도 부족했다. 나는 중동에서는 집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는 관습이 있는지 몰랐다. 나는 다후크에 도착한 직후 이 사실을 알게 됐고 결국 현금이 든 부츠를 현관에 두고 들어가야 했다.

나는 슬레마니 외곽에 주둔해 있는 페쉬메르가 소속 여군들 20~30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에 머물렀다. 나는 그곳에서 몇 주를 보내면서 이들의 일상을 낱낱이 촬영했다. 나는 사진 에세이를 작성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 여성들이 잠을 자고 훈련을 받으며 검문소를 지키고 저녁밥을 짓는 모습을 매일같이 사진으로 남기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당시에는 몰랐지만 누군가의 삶에 대해 전할 때는 소소한 것들을 통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수년간 나는 다른 장소에서 각기 다른 사람들이 비슷한 일을 하는 장면을 촬영했다.

여기에 실린 사진에는 칼라시니코프총으로 무장한 채 검문소를 지키고 있는 가쇼 자파르라는 군인의 모습이 담겨 있다. 나는 내 작품을 어떤 공모전에도 출품한 적이 없었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이 주최하는 사진 공모전에 이 사진을 출품했는데 믿을 수 없게도 나는 1등상을 받았다.

공모전의 심사위원 중에는 영국 출신의 인물 사진작가 데이비드 베일리가 있었다. 그는 내 사진을 알베르토 코르다가 찍은 유명한 체 게바라의 사진에 비유했다. 나는 평생 가져봤던 것보다 더 큰 금액인 5000파운드를 상금으로 받았다. 그리고 <가디언>으로부터 쿠르디스탄으로 돌아가 분리주의 단체인 쿠르디스탄 노동자당(PKK)의 여성 전투원들을 촬영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 상은 내가 사진기자로 경력을 쌓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나는 페쉬메르가의 부대를 처음 방문하고 10년이 지난 2014년에 그 부대를 다시 방문했다. 가쇼는 전역한 후였지만 이전에 만났던 많은 더 젊은 여성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이번에 그들은 새로운 적인 이슬람국가(ISIS)와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내게 주어진 일정은 빠듯했다. 내가 그곳의 여성들과 부대장 랜진 유수프 대령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간은 이틀밖에 없었다. 촬영을 마치고 한 달 뒤 유수프 대령은 페쉬메르가 여성으로는 최초로 2014년 10월 11일 ISIS와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전쟁의 실상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쿠르디스탄에서 나는 전쟁이 돈 맥컬린의 사진에서 보는 것과 다른 모습이고 윌프레드 오언의 시와도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폭력에 대해 널리 알리는 것이 폭력 자체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 때문에 내가 전쟁에 대해 보도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나는 아무도 전쟁에 대해 몰라서 전쟁이 일어난다고 짐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면 전쟁을 막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버지는 항상 내가 사진기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2017년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내 사진이 실린 잡지를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내가 하는 일을 응원해줬다. 

어머니는 심리 치료사이자 중재자가 돼 폭력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일을 한다. 어머니가 하는 일에서 영감을 얻은 나는 전쟁 사진을 찍는 방법을 바꿨다. 이제 나는 더 의도적으로 여성의 관점을 사진에 반영하려 한다. 나는 실재하는 사람들을 전쟁 이야기의 등장인물처럼 취급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인의 일상생활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분쟁 지역에서도 사람들은 계속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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