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영웅
글 : 재클린 커틀러
안네 프랑크를 숨겨주고 그녀의 일기를 지켜낸 비범한 여성은 스스로를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여겼다.
194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살던 미프 히스는 갓 결혼한 젊은 사무직 여성이었다. 그곳을 점령한 독일군의 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히스의 상사였던 오토 프랑크는 히스에게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숨겨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나치가 유대인들을 강제 수용소로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히스는 2년 동안 오토의 사무실 위 밀실들에 숨은 프랑크 가족과 다른 네 명을 위해 날마다 목숨을 걸고 몰래 음식을 전달했다.1944년, 나치가 결국 들이닥쳤고 프랑크 가족을 끌고 가버렸다. 그렇게 더 이상 이 가족을 보호할 수 없게 됐을 때도 그녀는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지켜내 그들의 이야기가 잊히지 않게 했다. 그녀 덕분에 전 세계인이 <안네의 일기>를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은 히스를 영웅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고난의 시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라며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평범한 비서나 주부, 10대 청소년이라 할지라도 저마다 소소한 방식으로 어두운 방 안에 작은 불빛을 켤 수 있습니다.”
“안네의 일기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는 반면 안네가 숨어 있던 건물 바깥에서 벌어진 일들은...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아내 조안 레이터와 함께 이번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한 토니 펠런은 말한다. 레이터는 그의 말에 이렇게 덧붙인다. “매일 사람들을 숨겨준다는 건 과연 어떤 느낌일까요? 미프는 오토 프랑크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어요. 그러고 난 다음에도 매일매일, 상황이 좋지 않을 때도, 몸이 아플 때도, 내키지 않을 때도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대답해야만 하는 거예요...나는 그녀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 고된 일을 해냈다는 것이 무척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30년간 부부로 지내온 펠런과 레이터는 6년에 걸친 조사 끝에 이 연속극의 연출과 제작 총괄, 각본을 맡았다.
히스 역을 맡은 배우 벨 파울리는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히스의 여정을 그대로 되짚어보기도 했다. “토니와 조안이 멋진 지도들을 줬어요. 미프가 오갔던 경로를 따라 내가 직접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닐 수 있도록 말이죠.” 그녀는 말한다.
화면에 담기는 모든 것은 최대한 정확하게 재현됐다. 시대를 반영한 의상들은 전시 상황임을 고려해 의도적으로 올이 다 드러나게 제작했다.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아름다움이란 쓸데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헤어 및 메이크업 담당 디자이너 다비나 라몬트는 은신 중인 여성들도 “외모를 가꾸고 싶어 했다”고 말한다. 립스틱을 살짝 바른 것은 송두리째 바뀐 현실 속에서도 예전처럼 평범해 보이고자 한 나름의 노력이었다.
어느 쌀쌀한 날, 프라하에서 보조 출연자 300명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했던 탱크를 타고 자갈길을 지나가는 미군들에게 환호성을 보냈다. 1945년 5월 해방을 맞은 네덜란드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프랑크 가족에게 해방의 순간은 너무도 늦게 찾아왔다. 안네는 그보다 몇 달 전에 체포돼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발진티푸스로 목숨을 잃었다.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었던 소녀는 꿈을 이뤘다. 그녀의 일기는 평범한 10대의 마음과 홀로코스트에 관한 진실을 특별한 방식으로 세상에 알렸다. 600만 명을 학살한 사건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던 독자들도 안네라는 소녀에게는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스가 흩어져 있던 종이들과 빨간색 체크무늬 표지의 일기장을 모아뒀다가 프랑크 가족의 유일한 생존자인 오토에게 전해주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키티에게”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안네의 일기를 읽지 못했을 것이다. 오토 역을 맡은 배우 리브 슈라이버는 히스가 그런 일을 한 이유는 그녀가 “다정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우크라이나에서 이민을 온 유대인 증조부를 둔 슈라이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반유대주의와 오늘날의 반유대주의가 유사하다고 본다. 그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우크라이나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목숨을 걸고 타인을 돕는 오늘날의 영웅들을 만났다.
“세상에는 미프 히스처럼 작은 불빛이 돼주는 평범하지만 대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독재와 권위주의, 파시즘에 맞서 싸웠죠. 그들이 성취한 일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이뤄낼 수 있는지도 알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슈라이버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