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다
글 : 니나 스트롤릭 사진 : 닐 제이미슨
인류는 새로운 탐험의 시대에 살고 있다.
미국의 옛 오리건 가도에는 원주민의 관점에서 미국의 서부 개척사를 보여주는 박물관이 단 한 곳 있다. 이 특별한 박물관은 워싱턴주와 아이다호주에 인접한 오리건주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다. 내부가 목판으로 된 전시실과 방문자 참여형 전시물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전통을 기념하는 동시에 개척자들이 몰려들면서 파괴된 문화유산을 기린다. 긴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면 방문객들은 건물 외관을 벽돌로 재현한 ‘원주민 훈련 학교’에 들어서게 된다. 이 학교에서는 과거에 원주민 아동을 강제로 개종시키고 이들에게 서구 사상을 주입했다. 실물 크기의 사진 속에는 10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학생들이 방문객을 응시하고 있다. 교복을 맞춰 입은 학생들은 마치 작은 군인들처럼 보인다.“역사가 제대로 전달되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직접 우리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죠. 바로 정복의 역사입니다.” 바비 코너는 말했다. 코너는 타마스트슬릭트 문화 연구소에 있는 한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소장직을 맡고 있는 이 연구소는 카이유스, 우마틸라, 왈라왈라 부족의 거주 지역인 우마틸라 보호구역 내에 있다.
탐험의 역사는 흔히 이분법으로 기술된다. 탐험가와 험준한 산. 탐험가와 외딴 섬. 탐험가와 미접촉 부족. 정복자와 피정복자. 오늘날 탐험의 정의는 더 광범위하다. 우리는 인체와 조상, 두뇌의 능력, 집의 개념을 탐구한다. 탐험가는 모험가이자 연기자인 동시에 과학자였으며 오늘날에는 거기에 새로운 역할이 하나 더 추가됐다. 바로 중재자다. 그들은 우리의 역사가 현재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선구자들은 역사책을 재검토하고 다시 쓰며 과거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1888년, 바로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과학자와 학자, 군인들이 모여 내셔널지오그래픽 협회를 설립했다. 본 협회는 지난 135년 동안 “지리 지식을 확대하고 전파할 목적”으로 바다와 하늘, 땅과 우주를 탐험해왔다. 본 협회가 비용을 지원하고 기록으로 남긴 탐험들은 때로는 관계 형성 그 자체보다 선도적인 역할에 더 중점을 두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런 역사적 성과는 미국 원정대와 공동으로 추진한 에베레스트산 등정에서부터 대서양 해저 지도 제작에 이르기까지 무궁무진했다.
‘최초’라는 수식어는 발견으로 바뀌었다. 본 협회는 과학과 우주 및 자연계를 철저히 탐구해 비밀을 밝혀냈다. 리키 가문은 조상들의 유해를 발굴했고 제인 구달은 침팬지들과 함께 살았으며 환경 보호 활동가 마이크 페이는 중앙아프리카 열대 우림을 가로지르는 3200km의 탐사로를 구축했다. 오늘날의 탐험가는 심지어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 인간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심해저에 투입된 촬영용 카메라를 탐험가라고 할 수 있을까?
모험담은 지난 수백 년 동안 탐험 욕구를 자극해왔다. 유럽의 대중 소설은 탐험의 시대로 알려진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대담한 여정에 나선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려줬고 이런 기사 문학이 콜럼버스나 마젤란 같은 탐험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본지에 실린 사진과 지도가 밖으로 나가 세상을 직접 보도록 사람들을 부추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험담은 탐험가가 대개 백인이라는 그릇된 믿음을 퍼뜨리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문학은 비서구권 국가의 탐험가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지난 500년 동안 이미 고인이 된 백인 남성을 중심으로 한 모험담이 지배적이었죠. 그로 인해 탐험은 백인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생겨났고요.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죠.”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는 말한다.

나는 본 협회의 기록 보관소에서 당시에는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현 시대의 탐험가들을 발견했다. 1920년대에 애덤 워릭이라는 필명으로 자신의 중국 탐험기를 출판한 여성 탐험가 줄리엣 브레든과 자동차로 남아메리카에서 북아메리카까지 최초로 원정을 떠난 파나마 출신의 인류학자 레이나 토레스 데 아라우스였다. 20세기 초에 중남아메리카에서 6만 4000km를 횡단하고 유럽에서 남아메리카로 향하는 콜럼버스의 여정을 되짚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최전선에 있던 참호를 촬영한 해리엇 찰머스 애덤스에 대한 기사들 틈에서 머리기사의 제목은 그녀가 여성에 대한 선입견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중 한 기사 제목은 ‘쥐를 무서워하지 않는 여자’였다.
우리는 새로운 탐험가를 발굴하기 위해 역사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과거의 탐험 이야기도 재평가한다. 탐험의 대상으로 종종 착취를 당하고 심지어 몰살되기도 했던 민족에게 탐험은 어떤 의미였을까? 어떤 장소가 진정한 의미에서 발견됐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또한 어떤 인물을 탐험가라고 봐야 할까?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지식을 얻었으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하와일까? 아니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상자를 열어 세상에 온갖 재앙을 불러온 판도 라일까?

카이유스와 네즈퍼스, 우마틸라의 혈통을 물려받은 코너는 타마스트슬릭트 문화 연구소에서 이 새로운 형태의 탐험을 설명하기 위해 ‘복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네즈퍼스 부족은 후손들이 모여 살면서 망자를 땅에 묻고 축제를 열 수 있도록 130ha에 달하는 조상의 땅을 취득했다. 부족의 이름이 지도와 도로 표지판에 다시 등장하고 있다.
코너에 따르면 우마틸라 원주민 보호구역 내 부족 연합은 박물관에서 자신들의 역사를 들려준다는 발상에 당혹스러워했다. 부족이 해체되고 땅이 파괴된 불우한 역사를 기념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오리건주 깃발에 개척자의 마차가 그려져 있고 의사당 건물 꼭대기에 개척자 동상이 세워져 있는 등 오리건주에서 탐험의 역사가 여전히 미화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했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 서부 변두리의 외딴 구석에 위치한 땅 자체보다 그 땅에서 펼쳐진 자신들의 역사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과 그 역사가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이 땅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중심이지만 전 세계의 다른 모든 인간과도 연결돼 있습니다.” 그녀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