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수호자들
글 : 니나 스트롤릭 사진 : 에밀리 가스웨이트 외 1명
민족의 역사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누가 그것을 구하기 위해 나서는가?
기사 본문에서 발췌한 내용을 일부 공개합니다.
세디크 살리흐(65)는 부탁할 것이 있었다. 해가 질 무렵, 우리는 술라이마니야에 있었다. 술라이마니야는 이라크령 쿠르디스탄의 문화 수도로 알려진 곳이다. 그날 밤 나는 아주 진귀한 쿠르드어 고서 문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한 비밀스러운 원로와 만나기로 한 상황이었다. 세디크는 항상 미소를 지었지만 지금은 진지해 보였다. “그에게 물어봐줘요. 많은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는데 ‘진’에 일부 기증할 생각은 없는지 말이죠.”쿠르드어로 “생명”을 뜻하는 진에는 세디크와 그의 형제 라피크가 20년 이상을 들여 수집한 기록물들이 보관돼 있다. 책과 필사본, 신문, 편지를 비롯해 19세기에 쓰인 수많은 기록물이 모여 있는 진에는 국가 없는 가장 큰 민족에 속하는 쿠르드족의 굴곡진 역사가 담겨 있다. 살리흐 형제는 이런 고문서를 수집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튀르키예와 이란, 시리아, 이라크에 걸친 쿠르디스탄 지역 곳곳을 누볐다. 이 산악 지역에는 자신을 쿠르드족으로 자처하며 서로 다른 종교와 풍습을 가진 약 3500만 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
쿠르드족의 역사는 메소포타미아가 내려다보이는 산악 지역에서의 삶부터 유명한 전사 살라딘이 이끈 중세 시대의 정복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쿠르드족의 독립을 약속했던 연합국들의 배신, 이라크에서 쿠르드족을 몰아내기 위해 1988년 당시 대통령 사담 후세인이 벌인 대량 학살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을 거듭한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살리흐 형제는 사명감을 갖게 됐다. 쿠르드족에게 국가는 없을지언정 역사적 기록물은 풍부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세디크와 라피크가 맡은 사명을 계속 이어간다면 말이다.
나는 세디크의 부탁에 놀랐다. 세디크와 영적 지도자 모함메드 알리 카라다기는 20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는 카라다기가 문집 전체를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다고 설명했다. 400년에 걸친 수백 개의 문서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세디크는 여기에 어떤 기록물이 포함돼 있을지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정치적 중대사들이 기록된 일기일까? 아니면 사라진 걸작 시나 비밀 외교 문서일까?
기록물을 보관하는 데 있어서는 모든 단서가 전체 역사의 새로운 부분을 밝혀낼 수 있는 흥미로운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세디크가 말했듯이 쿠르드족의 역사는 수백 년 동안 억압을 받아왔다. “우리가 하는 이 일은 전쟁입니다. 아주 평화로운 전쟁이죠.” 그는 말했다.
“부탁입니다. 그에게 물어봐줘요.”
기록물 보관인은 마치 탐정처럼 증거를 수집해 사건의 큰 그림을 그린다. 미국사를 영국인의 관점에서만 이야기한다고 상상해보자. 에이브러햄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과 체 게바라의 글, 넬슨 만델라의 연설 등이 없었다면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다양한 집단의 역사가 유입될 때마다 그 역사는 새로운 맥락과 미묘한 관점을 얻게 된다. 그 예가 바로 호주 원주민의 기원에 얽힌 이야기와 프리다 칼로의 그림, 아레사 프랭클린의 음악이다.
대다수의 선진국은 충분한 재원을 들여 관리하는 넓은 국가 기록관을 두고 있다. 기니비사우 혹은 팔라우 같은 작은 개발 도상국조차도 소규모 국가 기록관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국가들 틈바구니에서 주류 문화와 역사에서 배제된 채 분쟁으로 산산조각 난 땅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쿠르드족의 사정은 어떨까?
쿠르드족의 역사는 가방과 상자에 담겨 다락방 한 켠에 처박히기도 한다. 나의 조부모는 홀로코스트 이후 폴란드를 떠났고 나는 비자 신청서에 미국 출입국 관리가 이들의 국적을 “없음”으로 표시한 사실에 놀랐다. 조부모가 폴란드에서 유대인으로 살았던 것과 우리 집안이 유럽에서 수 세기 동안 살았던 것을 입증할 유일한 기록 증거는 여행 가방에 챙긴 한 줌의 문서뿐이었다. 바로 임시 폴란드 여권과 수용소에서 발급을 받은 신분증, 몇 장의 사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