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명소가 된 수도원
글 : 줄리아 버클리 사진 : 안드레아 프라제타
이탈리아 시골 곳곳에 있는 수도원과 예배당, 성지들은 새로운 시대의 여행객들에게 평온함을 제공한다.
데이비드 가그리치는 1994년 수학여행 중에 난생처음 이탈리아 라 베르나 수도원을 보게 됐다. 이탈리아계 크로아티아인 가정에서 태어나 크로아티아에서 자란 가그리치는 당시 겨우 14살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의 산속에 자리한 이 수도원이 그의 삶을 영원히 바꿔 놓았다.“가슴이 벅찼어요. 수도원 안에서 나던 목재 향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신이 내게 말을 건넨 것 같았죠.” 그는 말한다.
가그리치는 라 베르나 수도원 덕분에 자신의 영적 소명을 깨달았다. 프란체스코회 수도사가 되기로 서원한 그는 2001년 라 베르나 수도원에서 1년간 훈련을 받았다. 이후 토스카나 전역의 여러 수도원에서 20년,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1년을 보낸 가그리치는 다시 라 베르나 수도원으로 돌아와 데이비드 신부로서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이자 교황 대리직을 맡게 됐다.
1260년, 성 프란체스코의 초기 신도들이 설립한 이곳은 이탈리아에서 대중에게 개방된 수백 곳의 수도원과 성지 중 하나다. 이러한 수도원들은 “공동체 생활”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한 수도회 전통을 따른다. 하지만 이러한 고대 기독교 공동체가 현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만큼 그 전통도 현재의 상황에 맞춰 변화하고 있다. 가그리치 같은 수도사들이 관리하는 건물과 부지들은 이제 그 자체가 매력적인 관광지로 거듭났다. 다양한 종교를 가진 여행객들이 도시에 있는 혼잡한 관광 명소를 벗어나 이탈리아의 시골과 산에서 고즈넉함을 즐기고자 이곳을 찾고 있다.
수도원과 성지들은 약 1500년 동안 예배를 드리거나 식사를 하거나 하룻밤을 묵거나 경치를 즐기고자 하는 방문객들을 따뜻하게 맞이해왔다. 이러한 전통은 수많은 은둔자와 수도자, 수사들이 공동체 생활을 통해 신의 뜻을 따르고자 했던 중세 시대에 시작됐다. 중세 수도원은 하룻밤 묵을 손님을 자주 맞이하며 누구에게나 안전한 안식처를 제공했다.
“성 베네딕토는 손님을 그리스도처럼 맞이하라고 말했습니다.” 사크로 스페코 성지(‘거룩한 동굴’이라는 뜻)의 수도원장 마우리치오 비베라는 말한다. 이 성지는 이탈리아 라치오주 중앙에 있는 산맥의 암벽면을 따라 자리해 있으며 성 베네딕토가 6세기 초에 은둔 생활을 했던 곳이다. 비베라에 따르면 성 베네딕토의 가르침은 순전히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러 수도원을 찾는 이들을 비롯해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성 베네딕토는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가능한 한 전부 내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베네딕토회의 기본 원칙이 됐죠.” 그는 말했다.
사색과 예술, 음식을 즐기려는 방문객들은 차를 몰고 돌아다니거나 도보 여행을 할 수 있다. 라 베르나 수도원의 경우 현대의 영적 경험을 만끽하러 설피를 신고 나아갈 수 있다.
가그리치의 추산에 따르면 토스카나의 ‘포레스테 카센티네시, 몬테팔테로나, 캄피냐 국립공원’에 위치한 라 베르나 수도원은 해마다 약 60만 명의 방문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이 산은 1213년에 한 귀족이 성 프란체스코에게 은신처로 삼도록 선물한 곳이기에 성 프란체스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그는 이 지역에 와서 산을 돌아다니며 동굴과 바위 위에서 명상을 했다. 1224년, 성 프란체스코는 바로 이곳에서 성흔, 즉 그리스도의 손과 발, 옆구리에 십자가에 못 박힌 흔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주차장에서 7분 정도 걸어가면 마치 수백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 아래로 아찔한 낭떠러지가 있는 절벽을 따라 자리한 수도원에 도착할 때쯤 방문객들은 마치 13세기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는 성 프란체스코의 사후 그의 신도들이 이 수도원을 짓기 시작한 시기다.
절벽을 따라 89개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이끼가 낀 바위들이 있는 경계 지점이 나온다. 1220년대에 성 프란체스코가 명상을 하던 장소다. 그는 그중에서도 특히 가운데를 기준으로 둘로 쪼개진 한 바위를 기도 장소로 즐겨 이용했다고 한다. 그 바위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당시 하늘이 갈라지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막연하게 영적 경험을 하러 이곳에 옵니다. 뭔가를 기대하고 오는 사람들이 많죠.” 가그리치는 말한다.
라 베르나 수도원에서 “우리의 사명은 수도원으로서의 역할을 넘어 숙소 역할로 바뀌고 있다”고 가그리치는 말한다. 저녁에 수도원 문이 닫히면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는 방문객들은 성 프란체스코가 소중히 여기던 부엉이와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각자 자신만의 영적 경험을 할 수 있다. 포레스테 카센티네시는 수 세기 동안 수도원이 존재해온 숲이기에 ‘신성한 숲’이라고도 불린다.
이탈리아의 모든 수도원이 숙박을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모든 수도원에 수도사나 수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산 미켈레 수도원은 피에몬테 알프스의 구름 위에 우뚝 솟아 있으며 960m 아래로 수사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 총안을 낸 굴곡진 흉벽이 마치 풍경을 에워싸듯이 산과 조화를 이룬다. 수도원은 1622년에 문을 닫았지만 현장 안내인 엘리사 라바리노에 따르면 19세기에 로스미니회 사제들이 이곳으로 돌아와 영적인 활력을 되살리려 했다. 오늘날 이 수도원은 순례자들과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된 관광객들, 중세 시대의 산책로를 따라 계곡에서부터 묵묵히 올라오는 등 반객들로 한데 어우러진다.
마우리치오 수도사의 말처럼 베네딕토회 수도원들은 아마 외부인을 맞이한 경험이 가장 많을 것이다. 모든 수도원에는 반드시 손님용 숙소인 ‘포레스테리아’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수도원은 이를 현대에 맞게 적용했다. 이탈리아 시에나 남부의 그림 같은 구릉지에 자리한 몬테 올리베토 마조레 수도원에서는 방문객들이 유기농 농장에 있는 개조된 헛간에서 숙박할 수 있다. “우리 수도회의 원칙은 ‘기도하고 일하라’입니다. 우리는 700년 동안 끊임없이 와인과 기름 등을 생산해왔죠.” 안드레아 산투스 수도사는 말한다.
이 수도원은 예술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회랑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루카 시뇨렐리와 일 소도마가 그린 것으로 성 베네딕토의 삶이 담긴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또한 이 수도원에서는 하루 종일 그레고리오 성가가 울려 퍼진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 아름다움과 예술적 풍요로움, 특별한 방식으로 살아온 수도사들의 존재에 매우 놀랐습니다. 그들이 행하는 의식은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어져오고 있죠.” 안드레아 신부는 말한다.
현재 여행 안내인으로 일하는 미켈레 부실리오는 미술사 전공 학생 신분으로 몬테 올리베토 마조레 수도원을 처음 찾았을 당시 경외감을 일으키는 장관과 고요함에 압도당했다고 한다. 그는 더 이상 가톨릭 신자가 아니지만 경내에서 특별한 힘을 느꼈다고 말한다. “처음으로 소도마의 그림이 단순히 책에 있는 그림이 아니라 그가 그 그림들을 그린 풍경에 둘러싸여 더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사이프러스 숲을 지나면서 자연을 경험하게 되고 그로 인해 영혼과 마음이 훨씬 편안해지죠. 영혼과 일종의 화해를 한달까요.” 그는 말한다.
유럽 전역의 수도원들이 신입 수도사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이탈리아 곳곳에 세워진 이러한 수도원들은 사색의 공간이자 과거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수도원들은 이탈리아 도시에 있는 교회 또는 성당과는 달리 훨씬 더 고요하고 영적인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