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재연하기
글 : 해리 카츠 사진 : 리처드 반즈
"종군 화가들은 군용 전투식량을 나눠 먹으며 말을 타고 강을 건너고 산을 오르고 지쳐서 안간힘을 쓰면서도 언제나 연필과 종이만큼은 소중히 다뤘다. 거센 충격과 격렬한 전투, 포연과 전선 대치, 돌격전 그리고 승리 등은 전쟁의 구성 요소 중 하나였으며 그들은 그런 장면을 충실히 묘사해 독자들에게 전쟁 상황을 실감나게 알려줬다.” -1865년 6월 3일 자 <하퍼스 위클리>
기사 본문에서 발췌한 내용을 일부 공개합니다.
남북전쟁 당시에는 사진기의 셔터 속도가 너무 느려서 동작을 또렷하게 기록으로 남길 수 없었다. 매튜 브래디와 티머시 오설리반 같은 유명 사진작가들이 있었지만 거추장스럽게 큰 유리 감광판과 암실 장비를 실은 대형 마차를 이용했기 때문에 거친 들판을 마음대로 다닐 수도, 전투 장면을 제대로 찍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신문사들은 국내외 독자들을 위해 아마추어 및 전문 삽화가를 고용해 전투 장면을 스케치하도록 했다. 남북군 양쪽을 취재했던 이 ‘특수 화가들’은 미국 최초의 종군 화가들이었다. 이 젊은이들은 군인, 기술자, 석판 인쇄공, 판화가, 순수 미술가와 경험 많은 삽화가로 출신 배경이나 지원 동기가 다양했다. 이들은 돈을 벌거나 경험을 쌓거나 모험을 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모험의 대가는 혹독했다. 화가 제임스 R. 오닐은 남부연합의 게릴라 부대 ‘콴트릴 레이더스’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피살됐다. 다른 두 명의 종군 화가 C. E. F. 힐렌과 시어도어 데이비스는 부상을 당했다. 프랭크 비제텔리는 1862년 12월 버지니아 주 프레데릭스버그에서 가까스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나에게서 4m도 안 떨어진 곳에 포탄이 떨어져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출신인 한 병사의 머리가 박살났던” 것이다. 알프레드 워드는 1862년 여름 북부군의 전과를 기록하던 중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우리가 최근에 겪은 고초를 보상하지는 못할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