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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 등정사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가이가 최초로 등정에 성공한 이후 63개국의 남녀 약 1200명이 정상에 올랐다. 과연 어떻게 해야 세상의 맨 꼭대기에 설 수 있을까?

기사 본문에서 발췌한 내용을 일부 공개합니다.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하고 며칠이 지난 후, 에드먼드 힐러리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할 계획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정말 믿기 어려웠어요." 그때를 회상하며 힐러리가 말한다. "내가 기사 작위를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그는 우선 고향인 뉴질랜드의 파파쿠라에서 자기처럼 낡은 작업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기사 작위를 받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고 한다. "세상에, 새 옷을 한 벌 맞춰야겠군." 대영제국 변방의 뉴질랜드 출신이며 껑충한 키의 양봉업자인 그는 아주 새로운 종류의 영웅이었다. 1953년 에베레스트 원정에 나선 두 명의 뉴질랜드인 가운데 하나였던(다른 한 명은 친구인 조지 로위), 힐러리는 8명의 다른 영국인 등반대원보다 사회적 지위나 경험은 부족했을지 모르나 강인함과 끈기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벌을 치지 않는 겨울이면 뉴질랜드의 남알프스를 오르곤 했던 힐러리는 얼음과 눈 앞에서 누구 못지않게 대담했다. 그리고 그와 텐징은 결국 정상에 올랐다. 함께 양봉업을 하는 남동생 렉스도 7월의 기사 작위 수여식 참석차 런던에 왔다. 여기서 에드먼드와 원정대장인 존 헌트 대령은 기사 작위를, 텐징은 조지메달을 받았다. 식전에 버킹엄궁에서 열린 가든 파티에 예복 차림을 한 7500명 하객들이 비 때문에 우산 아래 몸을 웅크리며 모여 들었다. 렉스가 그때를 회상했다. "의전 요원들이 우리를 이 방으로 안내했어요. 귀족과 귀부인, 뭐 그런 높은 신분의 사람들과 함께 말이죠. 잠시 후 여왕이 들어오셨어요. 그땐 아주 젊고 아름다우셨지요." 에드먼드가 무릎을 꿇자 여왕이 조그만 검으로 그의 양쪽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말했다. "일어나시오, 에드먼드 경." 그 후 몇 주일간 샴페인 파티가 계속 이어져 힐러리는 처음으로 과음 때문에 고생하기도 했다. 기사작위를 받은 이 등산가는 오클랜드로 가는 길에 시드니에 들렀다. 시드니음악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루이즈 로즈에게 청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선뜻 청혼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정말 여자를 대하는 재주가 없었어요. 청혼하는 게 그냥 두려웠지요. 다행히 미래의 장모님이 아주 당찬 분이셨어요. 그분이 단도직입적으로 루이즈에게 결혼 얘기를 꺼냈지요."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이 사나이는 루이즈의 어머니가 오클랜드의 집에서 전화를 걸어 루이즈에게 결혼 얘기를 하는 동안 뒷전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 후에도 그는 원정대를 이끌고 최초로 바룬체(7168m), 차고(6893m), 페탕체(6738m)를 비롯한 여러 히말라야의 봉우리들에 올랐다. 또 남극을 횡단하는 영국 과학팀을 지원하기 위해 개조한 농업용 트랙터를 몰고 남극에도 갔다. 네팔에서는 예티라는 신화 속의 설인(雪人)을 찾아 다니기도 했고, 그 동안의 모험을 책으로 내기도 했다. 양봉을 그만둔 그는 1963년 시어스 백화점의 캠핑 자문위원이 되어 신형 텐트를 시험하러 아내 루이즈와 세 아이들을 데리고 휴가를 떠나기도 했다. 1975년, 루이즈와 막내 딸 벨린다를 태운 소형 비행기가 카트만두에서 이륙 직후 추락하여 전소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두 모녀는 파플루 마을로 힐러리를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 그는 렉스, 셰르파,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병원을 짓고 있었다. 에드먼드 경은 여러 해 동안 슬픔에서 헤어나질 못했지만 원조 활동에 몰입하며 육체 노동으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셰르파족 마을에 학교, 병원, 교량과 편의시설을 건설하는 사업은 셰르파 사람들에 대한 힐러리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에드먼드는 그래요. 누가 뭘 부탁해서 안 될 이유가 없으면 바로 일을 진행하고 실천하는 사람이죠." 뉴질랜드 출신의 오랜 친구인 짐 윌슨이 말했다. 이 원조 계획의 기금 조성을 위해 힐러리와 몇몇 친한 친구들이 창설한 '히말라얀 트러스트'는 오늘날까지도 계속 운영되고 있다. 1989년, 70세의 에드먼드 경은 준 멀그루와 재혼했다. 오늘날 에베레스트 지역의 많은 셰르파들은 이 두 사람을 가족같이 대해준다. 몇 년 전 쿰중 마을의 한 연회장에서 에드먼드 경은 이곳이 마치 고향 같다고 셰르파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나이 드신 분들은 모두 눈물을 글썽였어요." 평생 이곳에서 산 도마 참지가 말했다. 힐러리가 나이 때문에 점점 더 고지대에서 지내는 것을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83세가 된 지금도 짙은 눈썹, 흰 구레나룻, 바람에 나부끼는 긴 머리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에드먼드 경은 여전히 에베레스트 영웅으로 여러 곳에서 수시로 초청을 받고 있다. 오클랜드 박물관에서 에베레스트 모양의 케이크를 자르거나 뉴질랜드 럭비 국가대표팀인 '디 올 블랙스(The All Blacks)'에게 격려사를 하기도 한다. 그는 말한다. "에베레스트나 나에 대한 관심이 지금까지 계속되는 것은 내겐 참 놀라운 일이에요. 하지만 난 그 이유를 분명히 알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내가 단지 정상에 오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학교와 병원을 짓고 히말라야에 계속 기여를 해왔다는 사실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2002년 5월 25일, 에드먼드 경은 아들이 에베레스트에서 건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저 피터예요. 지금 정상에 있어요." 47세의 피터는 에베레스트 등정 50주년을 기념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원정대의 일원이었다. 원정대에는 텐징의 아들 잠링, 1963년 정상에 오른 최초의 미국팀 대원이었던 배리 비숍의 아들 브렌트도 포함돼 있다. "그래, 하산길 조심하려무나." 에드먼드 경이 주의를 당부했다. 두 사람은 날씨에 대해 몇 마디 더 나누었다. "저는 이곳에 올랐다는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워요. 이것을 아버지가 이미 50년 전에 해내셨다는 게 정말 믿기지 않아요." 피터가 말했다.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많을 것이다.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 베풀면서 살아온 그의 일생을 통해 에드먼드 경은 자신이 새로운 유형의 영웅, 아니 특별한 인간이라는 것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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