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처한 자연의 성지
글 : 데이비드 콰멘
인간에게는 공원이 필요하다. 삭막한 도심의 작은 공원이든 자연 속의 광활한 국립공원이든 모든 공원은 우리의 몸과 영혼을 살찌우고 지구의 생명을 지켜 나갈 뿐 아니라 공원을 지정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사회의 고귀한 이상을 반영한다. 하지만 일부 보호구역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기사 본문에서 발췌한 내용을 일부 공개합니다.
지난 20년 동안 국립공원이라는 아이디어는 일종의 반발에 직면했다. 정확히 말하면 가장 엄격하고 가장 원칙적인 공원 개념이 반대에 부딪힌 것이다. 간단히 말해 대결 구도는 ‘공원 대 인간’이다. 비판의 요지는 이렇다. 어떤 지역에 선을 빙 둘러 공원이라 부른 다음 그 땅에서 연명하는 가난한 사람을 쫓아내거나 따돌리는 것만 가지고는 자연을 제대로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분명 맞는 말이다. 65억이 모여 사는 지구에서 단지 접근을 금지하여 보호하는 방법은 정치적으로 실행 불가능하다. 또한 몰인정하고 부당한 처사다. 이득은 주로 공원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부유층이 누리는 반면 대가는 공원 가까운 곳에서 겨우겨우 살아가는 힘없는 사람들이 치른다. ‘동물은 구하고 사람은 몰아 내라’는 전략은 사용해서도 안 되며 들어맞지도 않는다. 결국 인기 없고 주민의 의사를 무시한 공원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압력과 필요에 압도되어 마치 뱃전이 낮은 방주처럼 가라앉을 것이다. 이런 논의를 극단적으로 끌고 가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국립공원을 만들어 자연지형과 생물다양성을 보호하는 것은 문화제국주의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한편 이에 반대하는 입장의 가장 극단적인 주장은 다음과 같다. 말 그대로 공원은 공원이어야 하고 보호는 보호이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철제 울타리와 무장 감시인도 무방하다.
두 입장 모두 전적으로 틀린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합의점을 찾기란 쉽지 않다. “공원에 관한 논쟁은 파탄으로 치닫고 있다.” 야생생물보호협회의 켄트 H. 레드퍼드와 그의 동료 두 명이 최근 ‘콘서베이션 바이올로지’ 지에 기고한 글에서 걱정스럽게 언급한 말이다. 설득력 있는 이 글의 제목은 ‘쉽볼렛이 되어 버린 공원’이다. 쉽볼렛이 무슨 뜻인지 가물가물하면 구약성서를 떠올려 보자. 쉽볼렛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단어로 어떤 단체나 신조에 대한 충성심을 알려 주는 일종의 암호다. 레드퍼드와 동료들은 ‘공원’이란 말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다 보니 의미 없는 용어가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보호론자와 그 반대론자가 치열한 논쟁을 벌이면서 공원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소모적인 논의는 “보호구역은 물론 보호구역 안이나 부근에 사는 주민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라고 이 글은 지적한다.
한편 이런 대립은 논쟁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2005년 5월 과테말라에서는 무장한 주민 100여 명이 라구나델티그레 국립공원의 연구 및 관리 캠프를 점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들은 공원 내 거주민 지위를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으며 몇 차례 협상이 결렬되자 네 사람을 인질로 잡기도 했다. 결국 정부가 인질 석방을 조건으로 물질적 원조를 약속함으로써 주민의 요구는 받아들여졌다. 4개월 뒤에는 케냐의 야생동물 및 관광부 장관이 암보셀리 국립공원의 등급을 국립보호구역으로 낮춰 원래 소유주인 마사이족의 부족위원회에 반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다채로운 경관과 더불어 코끼리로 유명한 암보셀리는 동아프리카 자연보호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29개 단체는 케냐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케냐 가제트(케냐의 관보)’에 공고만 하고 협의를 거치지 않은 등급 조정은 불법이라고 항의했다.
다시 한 번 사전을 들춰 보자. 이번 단어는 쉽볼렛만큼 오래되진 않았다. 국립공원 폐지를 의미하는 말로 영국을 비롯한 일부 나라에서 사용하는 단어다. 그것은 바로 ‘de-gazetting(법적인 보호에서 제외함)’이다. 우리 모두 알고 있어야 하는 단어이며 불행히도 앞으로 자주 접하게 될 용어다. 왜 그럴까? 많은 나라가 장기적 목표보다 단기적 욕망에 현혹되기 쉬운 상황에서 국립공원을 폐지하려는 움직임이 조만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글 첫머리에서 국립공원은 지리와 생태, 상징의 차원뿐만 아니라 경제의 차원에서 존재한다고 언급한 부분은 바로 이 점을 가리킨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를 더 첨가하면 국립공원은 정치와 시간의 차원에서도 존재한다. 지금까지 이뤄 놓은 게 아무리 귀하고 아무리 선견지명이 있어도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
물론 국립공원이 자연보호의 전부는 아니다. 국립공원은 그저 하나의 방법이고 수단이며 다른 방법보다 좀 더 눈에 잘 띄고 좀 더 복잡할 뿐이다. 야생동물보호구역과 금렵구역, 야생보호구역, 마다가스카르의 자연보호구역, 러시아의 자연보호구역 등 여러 나라에 다양한 형태의 자연보호구역이 존재한다. 국제기구인 세계자연보호연맹은 국립공원 외에 다섯 종류의 보호구역을 분류하고 있다. 전 세계 보호구역의 60% 이상이 이들 다섯 종류에 포함된다. 엄격한 의미의 국립공원은 전체 보호구역 가운데 22.7%에 불과하다.
그러나 다른 형태의 자연보호구역은 국립공원의 기능과 상징성이 결여돼 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의 현재를 즐기고 그 미래를 보장하기로 동의했다는 점에서 자연과 특별한 관계에 놓여 있는 국민의 개념을 나타내지 않는다. 국립공원만이 그런 개념을 구현한다. 한 국가에 주어진 특별한 선물을, 그리고 그 이상들을 더욱 확실히 더욱 자랑스럽게 나타내는 것이다.
세렝게티 국립공원을 찾아가 보자. 탄자니아 국민은 다소 불편한 점이 있지만 자신들의 땅에 사자로 가득한 대초원이 있다는 것을 일종의 특권으로 여긴다. 갈라파고스 국립공원은 에콰도르 국민들이 이곳의 풍부한 생물자원과 그 자원이 찰스 다윈의 역사적인 연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자바 섬 서쪽 끝에 있는 우중쿨론 국립공원은 멸종위기에 처한 자바코뿔소를 살리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는 인도네시아의 단호한 결의를 나타낸다. 피오르드랜드 국립공원을 보면 뉴질랜드가 남반구의 노르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