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혁명
글 : 로프 스미스 사진 : 스티븐 페리 외 다수 기관
19세기 말에 발명된 자전거는 그저 새로운 교통수단이 아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의미했다.
역사는 완전히 똑같이 되풀이되지는 않아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자전거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세계 각국이 수십 억 달러를 들여 자전거와 도보 중심으로 도시를 재정비할 준비를 하고 있는 지금, 19세기 말 자전거의 등장이 세상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되짚어보는 것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자전거는 오늘날의 스마트폰에 빗댈 수 있을 정도로 사회를 뒤흔든 파격적인 기술이었다.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1890년대의 몇 년간은 자전거가 궁극적으로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원하는 곳으로 언제든지 무료로 이동할 수 있게 해주는 빠르고 저렴하며 세련된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거의 누구나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수 있었으며 실제로 거의 모두가 이를 배웠다. 잔지바르의 술탄도, 러시아의 황제도 자전거 타는 법을 터득했다.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아미르는 자신의 모든 첩들에게 자전거를 사줬다. 하지만 누구보다 자전거를 유용하게 활용한 이들은 바로 전 세계의 중산층과 노동자 계층이었다. 인류 역사 최초로 다수의 대중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됐다. 값비싼 말과 마차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 ‘민중의 말’이라고 불렸던 자전거는 가볍고 비용 부담이 적으며 유지하기가 쉬웠을 뿐 아니라 도로를 달리는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이었다.
사회는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열성을 보인 것은 여성이었다. 여성들은 거추장스러운 빅토리아풍 치마(길고 풍성한 주름치마)를 벗어던지고 블루머(아랫단에 고무줄을 넣은 헐렁한 바지)와 ‘합리적인’ 옷을 입고 떼를 지어 거리로 나섰다. “자전거는 그 어떤 것보다 여성의 해방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1896년 <뉴욕 선데이 월드>와의 인터뷰에서 수전 B. 앤서니는 말했다. “나는 자전거를 탄 여성을 볼 때마다 멈춰 서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봅니다. 자유롭고 구속받지 않는 여성들의 모습을요.”
1898년 무렵 자전거 타기는 미국에서 매우 인기 있는 활동으로 거듭나 있었다. 이에 <뉴욕 통상 저널>은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로 인해 해마다 식당과 극장이 1억 달러 이상의 손실을 보고 있다고 밝혔다. 자전거 제조업은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혁신적인 산업에 속하게 됐다. 전체 특허 출원의 3분의 1이 자전거와 관련된 것이었다. 넘쳐나는 특허 출원을 감당하기 위해 미국 특허청은 별관을 따로 지어야 할 정도였다.
현대식 자전거를 발명한 것으로 널리 인정을 받는 사람은 영국인 존 켐프 스탈리다. 그의 삼촌 제임스 스탈리는 1870년대에 페니파딩(앞바퀴가 매우 크고 뒷바퀴는 매우 작은 초창기의 자전거)을 개발했다. 조금 덜 무섭고 안전하다면 자전거를 타고자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한 존 스탈리는 1885년 30살의 나이에 영국 코번트리에 위치한 자신의 작업실에서 훨씬 작은 바퀴 두 개와 체인 구동 방식을 이용한 자전거를 만들기 시작했다. 여러 개의 시제품을 시험해본 끝에 무게가 20kg에 달하는, 오늘날 우리가 자전거 하면 떠올리는 것과 거의 유사한 형태를 갖춘 로버 안전 자전거가 탄생했다.
1886년 자전거 박람회에서 첫선을 보였을 당시 스탈리의 발명품은 그저 색다른 물건으로 치부됐다. 하지만 2년 뒤, 새로 발명된 공기 타이어를 장착하자 그야말로 마법 같은 결과물이 나왔다. 공기 타이어가 운행 시 충격을 완화해줬을 뿐 아니라 약 30% 더 빠른 새롭고 안전한 자전거를 만들어낸 것이다.
전 세계 자전거 제조업체들은 앞다퉈 자신들만의 자전거를 만들기 시작했고 수요를 따라잡기 위해 새로운 업체가 수백 개씩 생겨났다. 1895년 영국 런던 스탠리 자전거 박람회에서는 약 200개의 제조업체가 3000가지 모델을 선보였다.
미국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 공장을 보유하고 있던 콜롬비아 바이시클스는 가장 큰 제조업체에 속했다. 이곳은 자동화된 생산 라인을 갖춘 덕에 자전거를 1분에 한 대씩 생산해냈다. 이 혁신적인 기술은 향후 자동차 산업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콜롬비아는 호황기를 누리는 산업의 첨단 기업답게 직원들에게 자전거 주차 공간과 개인 사물함, 구내식당 식사비 지원, 도서관 이용 등의 혜택을 제공했다.
수그러들 줄 모르는 자전거에 대한 수요는 볼 베어링, 바큇살에 쓰이는 와이어, 강관, 정밀 공구 제작 등 다른 관련 산업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들 산업은 자전거가 레저 용품 부문으로 밀려난 이후에도 오랜 기간 제조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예술가들이 자전거를 광고하는 아름다운 포스터 제작을 의뢰받으면서 풍부하고 선명한 색감을 내는 것이 특징인 새로운 석판 인쇄술과 관련된 시장도 구축됐다. 기존 상품을 계획적으로 구식화하고 해마다 새로운 모델을 출시하는 마케팅 전략도 1890년대에 자전거 사업과 함께 시작됐다.
자전거가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해 보였고 이에 따라 평범한 사람들이 놀라운 여정에 오르게 됐다. 일례로 1890년 여름, 한 젊은 러시아군 중위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영국 런던까지 자전거를 타고 하루에 평균 115km씩 달려 이동했다. 1894년 9월에는 24살의 애니 런던데리가 미국 시카고에서 여벌의 옷과 손잡이가 진주로 장식된 권총만 챙겨 여성 최초로 자전거 세계 일주에 나섰다. 1년이 채 안 돼 시카고로 돌아온 그녀는 1만 달러의 상금을 챙겼다.
한편 미국 서부에서는 1897년 여름 미국 육군 제25연대가 자전거의 유용성을 군에 입증해 보이기 위해 몬태나주 포트미줄라에서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까지 무려 3060km에 달하는 거리를 자전거로 이동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이 연대는 ‘버펄로 솔저스’로 알려져 있다. 버펄로 솔저스는 완전 군장을 하고 카빈총을 소지한 채 거친 진창길을 따라 하루에 평균 약 80km를 이동했다. 이는 기병대보다 두 배나 빠른 속도였지만 비용은 그의 3분의 1 밖에 들지 않았다.
자전거의 출현은 예술과 음악, 문학, 패션 등 삶의 거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쳤으며 심지어는 인류의 유전자 풀도 변화시켰다. 영국 내 행정 교구 기록에 따르면 1890년대에 자전거가 대유행하는 동안 서로 다른 마을에 사는 주민들 간의 혼인 사례가 확연히 늘었다. 새롭게 자유를 얻은 청년들은 교외 지역을 마음껏 돌아다니고 길에서 마주친 이들과 어울리며 먼 마을에서 만남을 가졌다.
열렬한 자전거 애호가이자 사회 현상에 대한 예리한 관찰자였던 작가 H. G. 웰스는 ‘자전거를 소재로 한 소설’을 여러 편 썼다. 그는 낭만적이고 자유로우며 계급을 허물어뜨리는 이 멋진 새 교통수단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부드럽게 풀어냈다.
자전거가 미래를 바꿔놓을 것으로 내다본 선구자는 웰스뿐만이 아니었다. 1892년 미국의 한 사회학 잡지에 기고된 ‘자전거의 경제적·사회적 영향’이라는 기사에서 저자는 “자전거가 도시 발전에 미치는 영향은 가히 획기적일 것”이라고 썼다. 이 저자는 도시가 더 깨끗하고 친환경적이며 평온해질 것이고 시민들은 더 행복하고 건강하며 외향적 성향을 띠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자전거 덕에 청년들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그로 인해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된다. 자전거가 없었더라면 집에서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닌 곳은 거의 가보지 않았을 청년들이 자전거를 타고 주변의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고 카운티 전역에 익숙해지며 휴가 기간에는 종종 여러 주를 탐방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험은 활력과 자립심, 독립심을 키워준다…”고 그는 적었다.
수백만 명에 달하는 자전거 이용자들의 정치적 영향력과 미국에서 가장 큰 산업 중 하나로 성장한 자전거 산업의 규모 때문에 도시의 도로와 시골길이 모두 빠르게 정비됐다. 자전거 이용자들이 그 당시에는 예측조차 할 수 없었던 자동차 시대로 나아가는 길을 닦아놓은 셈이다. 1895년, 미국 뉴욕주 브루클린에는 프로스펙트 공원에서 코니아일랜드까지 이어지는 미국 최초의 자전거 전용 도로가 생겼다. 개통 첫날 약 1만 명의 자전거 이용자가 이 길을 이용했다. 2년 뒤 뉴욕시 당국은 고속 운행을 즐기는 “속도광”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사태에 대한 대책으로 미국 최초의 도로 교통법을 제정했다. 뉴욕시 경찰청장 테디 루스벨트는 속도를 위반하는 자전거 이용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경찰들도 자전거를 타도록 했다. 그때까지도 도로를 달리는 교통수단 중 자전거보다 빠른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이 바뀌었다. 1890년대가 저물기 전, 유럽과 미국에서 자전거를 갖고 이리저리 발명을 하던 이들은 바큇살로 장력을 갖춘 바퀴와 체인 구동 방식, 볼 베어링을 모터와 결합하면 더 빠른 탈것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자전거만큼 조용하거나 저렴하지는 않지만 운전하는 재미가 있고 수익성이 있을 것으로 보였다.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는 자전거 정비사 윌버 라이트와 오빌 라이트 형제가 공기보다 무겁지만 날 수 있는 기계를 만들 수 있을지 탐구하며 자전거에 날개를 달아 공기 역학 시험을 해보고 있었다. 그들은 연구에 필요한 자금을 자전거 수리점에서 얻는 수익으로 충당했다.
한편 영국 북부의 코번트리에서는 1880년대에 로버 안전 자전거로 자전거 시대의 막을 열었던 존 켐프 스탈리가 1901년 46살의 나이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 그가 운영하던 회사는 소박한 자전거 대신 오토바이, 그리고 최종적으로 자동차를 생산하는 회사로 거듭나고 있었다. 모터 달린 탈것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헨리 포드라는 또 다른 전직 자전거 수리공이 모터를 갖춘 새로운 교통수단을 성공적으로 설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